앨범 정보

반성의 시간 (Remastered 2024)
백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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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앨범 평점 4.5/ 116명
  • 발매일 : 2008.05.19
  • 발매사 : MO records
  • 기획사 : 두루두루 아티스트 컴퍼니
세계의 이유 없음을 몸서리쳐지게 깨달은 사람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가 보는 세계의 사물들은 모두 이전과 다르다. 이전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파국적 사건과 함께 다시 구성된다. 세계를 보는 눈의 동공은 커졌을 것이고 호흡과 맥박도 일정치 않을 것이다. 이때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부여가 사실상 강제된다. 이것을 이해하고 어어부 이후 백현진의 독집 음반을 들으면 그의 노래가 왜 그렇게 깊고도 서늘하게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다. 어어부라는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그래서 백현진 자신인 ‘나’의 고백으로도 들리는 노래들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된 피상적인 사물들을 과도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여름바람>의 ‘나’는 창문을 열다가 책상 위의 명함들 중 어떤 이는 벌써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언젠가 목련꽃을 보다가 느꼈던 현기증, 과거의 스포츠 신문, 어머니의 염색과 아버지가 챙겨 먹는 비타민 등을 떠올린다. 그러다가 새로 나온 12인치 노트북 같은 전혀 상관없는 사물로 관심을 옮겼다가 술과 함께 이내 빠져나온다. <어른용 사탕>에서 자살을 생각한 여자는 토끼 두 마리와, 토끼 두 마리의 이름과, 토끼들을 구입할 때의 가격과, 죽은 토끼를 묻어 주다 손이 까졌던 기억을 더듬다가, 돌고래 쇼에서 튀는 물방울과, 무교동 여관방의 ‘축 발전’이라고 쓰여있는 시계를 바라본다. 이토록 낯선 세계를 보게 된 계기는 노래에서 아주 생략된다. 여자의 어머니가 자살에 실패했다는 구절로 대강의 짐작만 해볼 뿐이다.

물론 이런 묘사는 노래 속 화자의 특수한 상태를 내비치기 위해 백현진이 의도한 장치일 수 있다. 그럼에도 <학수고대했던 날>에 등장하는 혼탁한 기억과 뒤섞인 세밀한 묘사는 도저히 계산된 기교로 들리지 않는다. 계산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이 노래의 ‘나’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과거 어느 날의 기억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돼지기름이 흰 소매에 튄 순간과 젓가락 한 벌을 떨어트렸던 기억, 그때 ‘너’로부터 어떤 고백을 들었던 기억, 막창 2인분에 맥주 열세 병을 마셨다는 구체적인 기억을 끌어안고 있다. 하지만 다른 기억은 뚜렷하지 않거나 이미 잊어버렸다. ‘너’의 속삭임과 몸짓은 물론이고 얼굴마저도 기억하지 못한다.

<학수고대했던 날>의 ‘나’는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날로부터 현재 사이에 어떤 일을 겪었음이 틀림없다. 남은 것은 재구성된 기억뿐이다. 그는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상실에 붙들려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그 흔적조차 잊혀지고 있다.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를 반복한다. 만취한 이의 너절한 말이 아니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을 애도하는 말이다. ‘너’에 대한 기억을 잃으면서 슬픔이나 회한같은 것도 잃어 가고 있기에, 슬픔이나 회한 같은 단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감정의 원형을 담고 있다. 백현진은 그 원형을 반성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상실의 애도를 담은 백현진 1집 음반의 제목이 《반성의 시간》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는 일> 중 ‘손이상’의 글 발췌


내게는 겨울 오후에 맨발로 춥게 들을 때 너무 좋았던 깨끗하고 환한 좋은 음악들이다.
-홍상수(영화감독)

백현진과 함께 [어어부 프로젝트]를 하는 장영규는, 한국에서 내가 주저 없이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단 두 명 중에 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누구냐고요? 백현진입니다.
-박찬욱(영화감독)

처음부터 끝까지 쭉 듣기 좋은 앨범입니다. 밤 11시에 즈음에 습기가 많은 공간에서 조도를 낮추고 옅은 차를 내리고 전곡을 천천히 들으며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오혁(음악인)

《반성의 시간》이라는 작명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현진은 잘 이해하고 있다. 그의 춤사위/목소리/SNS에 표현하려는 무언가들이 꽤 찝찝하다는 것을. 현진은 여태 탐닉해왔다. 구역질 나고 주체할 수 없는 폭력적인 사연들을. 그런 관점에서 《반성의 시간》이라는 작명은 좀 웃기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성의 시간》은 현진의 노래하는 모습보다는 거울 앞에서 10시간 45분간 면도와 흡연을 거듭하는 모습을 연상하는 게 훨씬 쉬운 앨범이라 생각한다. 나아가선 뒤에서 묵묵히 소주를 따르는 내 모습까지 상상하곤 한다. 그를 기다려준다. 나는 이런 식으로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나는 《반성의 시간》이라는 앨범에 진 빚이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기에 이 앨범이 다시 소개되는 거라 감히 추측해 본다. 정말 축하할 일이고,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시간과 마음이 허락할 때 1번 트랙부터 마지막까지 여유롭게 즐겨보길 바란다.

본 소개 글이 모두에게 필요한 메시지였길 바라며.
-김한주(음악인)

《반성의 시간》 리마스터 반 발매를 기념해 앨범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고 집에 가서 바로 후회했다. 이 앨범은 2008년 내가 스무 살, 갓 대학에 입학해서 매일 같이 코가 비뚤어지게 마실 때도, 지옥 같은 연애로 고통받을 때도, 한동안 말하기를 멈추었을 때에도, 새벽에 학교 옥상에 앉아 남산타워를 볼 때에도 항상 내 귀에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내 피부에 닿아있는 음악에 대해 쓸 수가 있나? 《반성의 시간》은 정물화처럼 어떤 구체적인 시간을 그리고 있고, 그 시간들은 청자가 지나온 시간과 기묘하게 교차되기도, 병치되기도 한다. 화자는 내가 되기도 하고, 그가 되기도 하고, 현재에도 도처에 있다. 이 그림 속의 욕망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유는 헛웃음이 날 만큼 투명한 그의 솔직함 때문일 것이다. 그때 왜 난 이렇게 솔직하지 못했나, 혹은 지금도 그러지 못하나, 이 글에서도 또 무엇을 자꾸만 반성하려다가, 그만둔다. 《반성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달고는 굳이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시간은 거기 있고 너도 거기 있었고, 그것 또한 중요하다고 어깨를 두드리는 앨범이다.
-이민휘 (음악인)

1. 무릎베개
노랫말 속 딸린은 에스토니아의 수도다. 발트해를 통해 스톡홀름, 리가, 코펜하겐으로 이어지며 핀란드만 건너편에 헬싱키를 두고 있다. 화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바다 위에서 수년 전의 기억을 되새긴다.

2. 학수고대했던 날
<무릎베개>, <목구멍>, 그리고 아마 음반 후반부의 몇 곡과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곡이다. 화자가 조각난 세계의 단편에 붙들려 미안함을 고하는 것은 잊혀져 가는 한 사람이 아니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전부이다. 그에게는 기름으로 얼룩진 술냄새 외에는 그 시간을 예쁘게 꾸며댈 수 있는 것이 남아있지 않았다.

3. 목구멍
이제 없는 이는 영원히 없다. 그래서 그가 남기고 간 글씨와 그가 사준 베개를 통해 더욱 강렬하게 머무른다. 상실감의 끝에서 화자는 낯선 비현실의 공간이 된 방구석을 담배연기로 채운다.

4. 어머니 검도 교실


5. 닉의 고향
노랫말 속 MI는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홍대 놀이터에서 상수동 방향으로 내려오는 안쪽 길에 있던 테크노클럽이다. 자정이 넘어야 사람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네가 주한미군 닉을 만난 때는 야심한 밤이었을 테고, 둘이 함께 거리로 나온 때는 이미 푸르스름한 아침이었을 것이다.

6. 깨진 코
노랫말 속 도산공원은 신사동과 압구정동의 중간, 고급 갤러리들과 명품매장들 한가운데 있다. 《반성의 시간》의 다른 노래들과 달리, <깨진 코>가 묘사하는 풍경은 썩 특별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화자는 너무 평온하여 낯선 가을에 자신을 이입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코피를 닦고 힐끔 쳐다본다.

7. 어떤 냄새


8. 여름바람
어떤 경험을 털어내고 자잘한 일상으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여전히 더딘 시간을 견디면서 낯익은 착각으로 창문을 열었다가 어리둥절해한다. 이 음반에서 유일하게 타인의 죽음을 언급한다.

9. 눈물 닦은 눈물
백현진은 어어부 시절부터 청승맞은 표현과 과장된 울부짖음이 청취자/관객의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어어부 시절부터 즐겨하던 순댓국 이야기를 다시 하면서, 그 안에 그는 지극히 사적인 진짜 토로를 넣었다. 그래서 웃을 수도 없고 따라 울 수도 없다.

10. 보험 회사 대중탕


11. 어른용 사탕 (feat. 김윤아)
망설임 없이 반복하는 연주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어둡지만 낙담하지 않는 어조로, 불안한 사건을 마치 서스펜스를 묘사하듯 노래한다. 김윤아와 함께 불렀다.

12. 아구탕에서 나온 네 명
노랫말 속 둘둘치킨은 인사동에 있지 않고 낙원동의 끝자락, 종로2가 앞에 있다. 낙원상가 앞 원조 마산 아구탕 본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인 이곳은 근방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침까지 영업하므로, n차 술자리의 마지막, 지하철 첫차 전까지 만취한 술꾼들이 머문다. 거리에서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고 박찬호가 레인저스로 이적한 2000년대 어느 시점에도 그랬다.

[Credit]

All tracks written, produced by 백현진
Recorded by 방준석 & 백현진 at kimpo studio

2008 Original tracks mixed by 이재혁 & 권병준 at j’s Studio
2008 Original tracks mastered by 황병준 at sound mirror

2024 track 4 Re-mixed by 백현진
2024 Re-mastering Engineer Vlado Meller
Assistant Mastering Engineer Jeremy Lubsey
Mastering Location Vlado Meller Mastering in Charleston, SC

Artwork by 백현진
Design Works by 모임 별

01 무릎베개
Acoustic Guitar 방준석
Metronome 안성철씨

02 학수고대했던 날
Piano 정재일
Electric Guitar 방준석
Chorus 권병준

03 목구멍
Piano 정재일
Slide Guitar 방준석
Nylon Guitar 권병준
Electric Bass 박현준

04 어머니 검도 교실
Piano 이병훈

05 닉의 고향
Acoustic Guitar 신윤철, 방준석, 성기완
Synthesizer 성기완
Chorus 김연임

06 깨진 코
Acoustic Guitar & Tambourine 방준석
Whistle 조윤석

07 어떤 냄새
Piano 정재일
Synthesizer 권병준
Trumpet 방준석
Electric Bass 박현준

08 여름바람
Piano 정재일
Acoustic Guitar 성기완
Electric Guitar 신윤철
Beat 달파란

09 눈물 닦은 눈물
Up-right Bass 정재일
Acoustic Guitar 신윤철
Noise 이재혁

10 보험 회사 대중탕
Acoustic Guitar 방준석
Electric Guitar 신윤철

11 어른용 사탕 (feat. 김윤아)
Female Vocal 김윤아
Electric Bass, Acoustic Guitar & Electric Guitar 신윤철
Drum 손경호

12 아구탕에서 나온 네명
Acoustic Guitar, Electric Guitar & Synthesizer 신윤철
Synthesizer 권병준
Brush Drum 이철희
Djembe 손경호


Distributed by MO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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