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소신의 공존, 원더걸스 [REBOO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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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과 소신의 공존, 원더걸스 [REBOOT] (2015)

2019.11.14
Special

자본과 소신의 공존, 원더걸스 [REBOOT] (2015)

깔끔하고, 세련됐다. 일단 작곡이 잘 됐고, 사운드 프로덕션의 마감 처리도 빼어나다. 1980년대 뉴웨이브 사운드를 이 음반만큼 탁월하게 재현한 경우는 몇 개 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기실 이 앨범을 발표하고 나서 큰 히트를 기록했다고 정리하기는 어렵다. 가히 시대마저 갈랐던, 과거의 거대 히트곡에 비한다면 말이다. 대신 예민한 촉수를 지닌 음악팬들이 반응했다. 도리어 팬 베이스가 넓어졌다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장담하건대 이 음반의 가치는 시대가 흐를수록 높아질 것이다. 바로 원더걸스의 정규 3집 [REBOOT]다.

글 | 배순탁 (음악평론가,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Album

원더걸스 [REBOOT] (2015)

REBOOT


"리부트"라는 타이틀에 먼저 눈길이 갔다. 무언가 "새로운 시작점"으로 작용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욕망을 상징화하고 있는 단어다. 앨범 발매 전 발표했던 티저만 봐도 리부트라는 표현은 꽤나 그럴듯하게 보였다. 베이스, 드럼, 기타, 피아노 순으로 공개된 이 티저들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고 기대치를 부풀렸다. 모두가 기억하는 당시의 풍경이다.

[REBOOT] 통한 원더걸스의 지향은 대략 다음과 같다. 기존 아이돌 음악에 없(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탑재하는 것이다. 힌트는 그들이 악기를 "직접" 연주한다는 사실에 위치한다. 당시 동영상에 주렁주렁 달린 댓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의견은 대체로 이렇게 수렴됐다. "이제 원더걸스는 아이돌의 클래스를 넘어섰다"라는 것이다. 이런 구분 짓기는 오래된 대립항을 연상케 한다. 가짜와 진짜는 "진정성"으로 구분될 수 있고, 대중음악에서 대개 전자는 "아이돌"을 후자는 "리얼 악기"의 세계를 꼽는다는 식이다. 그렇다. 앞서 말한 "무언가"는 바로 이 진정성이다.

진정성이라. 세상에 이만큼 애매모호한 단어가 또 있을까. 당신은 음악을 감상할 때 진정성을 어떻게 감별하는가. 진짜 악기를 쓴 밴드 음악에 진정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꽤 봤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요즘에는 진정성 엄청 따지는 외국 음악 잡지에서도 진짜 악기라고는 한 톨도 쓰지 않는 음악에 높은 점수를 준다. 심지어 이런 음악이 리얼 밴드보다 더 강렬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직접 연주"하는 것이 좋은 음악이라고 확신하고는 한다. 글쎄. 그 믿음이 대견하지만 그 믿음이 때로는 좀 안쓰럽다.

어떤 사람들은 "싱어송라이터"가 진정성을 담보한다고 의견을 제시한다. 아이고, 그런데 이걸 어쩌나.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위대한 가수로 꼽히는 Aretha Franklin은 모두 남이 써준 노래를 불렀다. 예시가 너무 부족하다고? Elvis Presley, James Brown 등등, 곡을 받아 노래한 가수의 리스트는 끝도 없다. 한국에서도 노래만 불렀으나 예술가 위치에 오른 가수가 부지기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높게 쳐주는 관습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 확신을 이해하지만 그 확신이 때로는 좀 불편하다.

이런 믿음과 확신이 여전히 뿌리 깊음을 알기에 아이돌 기획사 측에서는 이걸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이번 앨범에서는 멤버들이 작사, 작곡, 프로듀스에 직접 참여했어요." 원더걸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리얼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전시한 뒤 "연주는 멤버가 직접 했음"을 큼지막한 폰트로 홍보하고 앨범 스포일러에서는 송라이팅에 멤버들이 관여했음을 다시 한번 인지시켰다. 뭐랄까. 아이돌 출신이지만 여타 아이돌들과 가는 길이 다름을 아이돌 전문 기획사에서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재미있는 역설.

1980년대를 소환하는 비트를 멋지게 구현한 'Baby Don't Play'를 시작으로 근사한 곡들이 이어진다. 레트로라는 기치 아래 일렉트로 팝의 비전을 탄탄하게 건설해낸 곡들이 여럿이다. 'Candle'에서의 들을 수 있는 반복적인 저음 터치는 물론이요, 'I Feel You'에서는 1980년대 후반 메트로폴리탄의 감성을 대변한 프리스타일 장르를 근사하게 풀어냈다. 과연, 초반부만으로도 가성비 쩌는 음반이다. 메인스트림에서 뉴트로를 몇 년 앞서 예견한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정은 쓸모없다지만 몇 년만 뒤에 발표되었어도 더 큰 주목을 받았을 게 틀림없다.

'Loved'에서 들을 수 있는 신스 베이스는 'Candle'과 궤를 같이 한다. 대신 랩을 더해 차별화를 일궈냈다. 'One Black Night'는 어떤가. 관능적이고 도발적이다. 나의 경우, 음반 최고의 곡으로 꼽고 싶다. '사랑이 떠나려 할 때'의 유연한 그루브는 정말이지 끝내준다. 곡 전반에 걸쳐 바이브를 제대로 살렸다.

중요한 건 취향이라고 본다. 누구에게나 취미는 있을 것이다. 만약 음악 듣기가 취미라고 한다면 이걸 습관화했을 때 취미가 취향으로 성숙된다고 믿는다. 이 취향이라는 놈을 끊임없이 갈고닦으면 어떤 안목이나 통찰 같은 게 형성되지 않을까. 나는 지금까지 정말 뛰어난 안목과 통찰을 지닌 사람이 어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섣불리 재단하지 않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순한 대립항에서 해방될 때 더욱 즐거운 음악 듣기는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작사, 작곡했고 연주했다는 건 적어도 나에게 큰 이슈가 못 됐다. 음악이 훌륭하면 그뿐이다. 원더걸스의 [REBOOT]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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