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장수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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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장수를 기리며

2018.05.08
Special

누군가의 장수를 기리며

얼마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Avicii를 생각하며 제가 몸담고 있는 클래식 음악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작곡가, 연주자 같이 이 음악계를 지탱하고 있는 여러 아티스트들을 떠올리다가 문득 지휘자에서 생각을 멈췄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유명 지휘자의 죽음에 대해서 꽤나 인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이들의 늦은 죽음, 다시 말해 천수를 누리고 간 삶에서 그 이유를 찾아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휘자를 수식하는 언어들은 한정적입니다. "대가", "거장", "마에스트로", "관록", "연륜" 등등. 이런 단어들 사이에서는 젊음이나 천재성을 찾기란 어렵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지휘는 경험이 켜켜이 쌓여야만 할 수 있는 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재 지휘자의 때이른 죽음"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유명 지휘자들은 꽤 나이가 많습니다. 전성기로 분류하는 구간도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그 연령이 압도적으로 높기도 하죠. 그들에게는 50-60대가 전성기이며 건강만 허락한다면 이후에도 하강곡선을 그리는 일이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명성을 지닌 지휘자들은 치열한 노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을 축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요? 나이를 먹을수록 쌓이는 명성에 높아져만 가는 지휘료. 이러한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은퇴하는 지휘자는 거의 없습니다. 중병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들은 비행기에 오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 어쩌다가 한 두번 지휘를 못하는 경우도 괜찮습니다. 몸이 회복되는 순간 세상은 다시 그를 불러줄 것입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그날까지 말입니다. 오늘은 세상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지휘자 3명을 소개합니다.

1.

네빌 마리너 (1924년 4월 15일 – 2016년 10월 2일)

지휘자는 보통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예기치 않는 세상의 모든 변수들을 처리하는 능력이 있어야지만 번듯한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네빌 마리너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리 음악원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업은 바이올리니스트요 1958년에 기나긴 이름의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를 조직할때도 큰 욕심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런던에 있는 뜻있는 음악가들을 모아 함께 바로크 음악을 연주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네빌 마리너가 본격적으로 지휘봉을 잡은 것은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첫 연주회 10년 뒤인 1969년이었고 악단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마치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클래식 음악을 녹음할 것이라는 기세를 가지고 연주, 녹음 활동에 임한 것이죠. 이런 활동의 원인은 재정적으로 홀로 서야만 했던 단체의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네빌 마리너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여 악단을 안정된 위치로 올려 놓았고 이는 현재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명성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곡리스트 16

2.

조르주 프레트르 (1924년 8월 14일 – 2017년 1월 4일)

지휘자 조르주 프레트르는 장수가 명성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증명하는 지휘자였습니다. 본래 오페라계에서 주로 활동하던 이 프랑스 출신 지휘자는 그 업계에서는 장인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보통 음악계에서 오페라만 주로 작업하는 지휘자는 콘서트무대에 설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세월이 정정했던 그에게 조금씩 명성을 얹어주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빈 필하모닉이 새해 첫 날 매년 음악계 최고 지휘자를 선정해 지휘봉을 맡기는 신년음악회의 지휘자로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때가 2008년, 프레트르의 나이 81세였고 신년음악회 최고령 지휘라는 기록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2년 뒤인 2010년에도 같은 무대에 올라 기록을 83세로 경신합니다. 아 빈 신년음악회를 지휘한 최초의 프랑스 지휘자인 것도 언급 해야겠네요.

곡리스트 14

3.

이르지 벨로흘라베크 (1946년 2월 24일 – 2017년 5월 31일)

체코의 지휘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 저는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얼마 전에 알았습니다. 데카 레코드에서 한창 그의 드보르작 사이클이 발매되고 있었고 그 중 한 앨범의 라이너 노트를 써내려가던 것이 불과 얼마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71세, 단명했다고는 보기 어려운 나이지만 생전 활발한 활동을 생각했을 때는 못내 아쉬운 죽음이었습니다.

서유럽에 가장 가까운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정권의 영향을 받았기에 체코의 음악가들은 제한된 공간에서 활동해야만 했습니다. 벨로흘라베크 또한 바로 옆나라인 독일 연주 여행을 금지 당할 정도로 당국의 제제를 받았죠. 민주화 이후에는 상황이 좋아졌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벨로흘라베크가 지휘봉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체코 필하모닉 또한 심한 내홍을 겪습니다. 오케스트라 내부의 음악가들은 상임지휘자 선정 문제로 격하게 싸웠고 벨로흘라베크는 예정보다 빠르게 지휘봉을 내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던 벨로흘라베크와 체코 필하모닉의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2012년, 벨로흘라베크는 체코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코 필하모닉이 체코 음악의 최고 권위자임을 증명해냈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지휘자의 마지막 투혼이었습니다.

곡리스트 16